본문 바로가기

scrap

칼 세이건



별에 매료된 소년, 화성 탐사선을 띄우는 과학자가 되다

- 1934년 11월 9일 생, 미국 뉴욕 주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1951년에 시카고 대학에 들어간 칼 세이건은 천문학과 천체물리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9년에는 금성 탐사선 매리너 호 계획으로 NASA와 처음 인연.

- 1963년에 세이건은 하버드 대학의 천문학 강사로 초빙, 이듬해에는 첫 번째 결혼에 실패. 1957년에 결혼한 세이건과 린 알렉산더. 알렉산더는 남편의 그늘에 머물기를 거부. 이혼 후 결정학자인 토머스 마굴리스와 결혼한 그녀는 린 마굴리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생물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녀는 아들 도리언 세이건과 함께 여러 권의 과학 교양서를 펴냈다.

- 소행성대 및 목성을 탐사하고 인류 최초로 태양계를 벗어난 우주선 파이어니어 10호(1972년)와 11호(1973년) 계획에 관여한 그는 이른바 외계에 보내는 인류의 메시지를 담은 알루미늄 판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 판에는 인간 남녀의 모습과 태양계에서 지구의 위치 등을 가리키는 그림(린다 세이건이 그린)이 들어 있었다. 세이건은 사상 최초로 화성의 지표면 모습을 전송한 NASA의 화성 탐사선 바이킹 계획(1976년)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대표적 프로그램, 코스모스

- 1976년에 칼 세이건은 공영방송 PBS와 13부작 과학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로 합의. 1980년 9월 28일 첫 방영된 <코스모스>는 전 세계 60개국에서 6억 명의 시청자가 지켜봄으로써, 세계 방송 역사상 가장 시청률 높은 시리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해설자로 등장한 칼 세이건은 보이저 호의 목성 사진 같은 최신 자료와 다양한 세트를 이용하여 우주와 인간, 과학의 역사, 지구의 미래 등에 관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펼쳐 보였다. 이 프로그램 덕분에 칼 세이건의 이름과 얼굴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곧이어 나온 단행본 <코스모스>도 불과 두어 달 만에 40만 부가 판매되고 70주 이상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라 있었으며, 무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판매.

- 세이건은 과학 저술가로도 호평을 받았다. 그의 저서인 <에덴의 용>(1978)은 논픽션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유일한 소설 <콘택트>(1985)는 여러 출판사 간의 경쟁 끝에 당시로선 사상 최대인 200만 달러의 선인세를 받아 더욱 유명해졌다. 1981년, 세이건은 두 번째 부인 린다와 이혼하고 <코스모스> 제작 과정에서 친해진 작가 앤 드루얀과 결혼한다. 핼리혜성이 돌아온 해에 맞춰 간행된 <혜성>(1985)은 세이건과 드루얀의 첫 번째 공저였고,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1992)는 두 번째였다. 드루얀의 영향으로 세이건은 이후 환경 및 정치 문제에도 관여해 진보적인 입장을 대변했다.


과학자에서 더 나아간 합리주의자, 칼 세이건

- 특히 냉전 말기인 1980년대에 세이건은 미국과 소련 양측에 ‘핵겨울’의 위험을 경고.

=> 다수의 핵무기가 폭발할 경우에 발생하는 연기와 먼지로 인해 햇빛이 차단되고, 추운 날씨가 지속되어 생물에게는 치명적이란 사실.(물론 이 주장은 실제보다 많이 과장된 것으로 드러나 나중에는 폐기되었다).

=> 레이건 정부가 미국이 천문학적 예산을 들여 추진하던 ‘스타워즈 계획’의 허구성도 폭로. 만약 핵전쟁이 일어날 경우, 가령 1만 기에 달하는 소련 핵무기의 90%를 막아낸다 하더라도, 나머지 1천 기는 미국 전체를 박살내기에 충분한 양이라는 지적. 따라서 유일한 해결책은 양국의 핵무기 감축밖에는 없다는 것

- 1990년대에는 낙태와 종교 같은 보다 논쟁적인 문제에 적극 뛰어들어 과학자이며 합리주의자로서 자신의 신념을 밝히는 데에 앞장섰다. 1994년에 세이건은 백혈병의 한 종류인 골수이형성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기독교는 물론이고 힌두교와 이슬람교 성직자들도 그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불가지론자였던 세이건은 죽음 앞에서도 끝내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지 않았다, 1996년 12월 20일, 칼 세이건은 62세를 일기로 사망.


천문학을 넘어서 과학을 대중화하고 핵 위험을 경고하다

- 그는 대중적 명성 못지않게 전공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긴 과학자다. 40년 넘는 활동 기간 동안 단독 및 공동으로 500여 편의 논문과 저술 등을 발표했는데, 대략 한 달에 한 편 꼴인 압도적인 양이다. 특히 금성의 온실효과, 화성의 계절 변화 등에 관한 연구 등은 세이건의 가장 훌륭한 업적으로 꼽힌다. 그는 개인 연구보다 NASA 등에서 팀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더욱 능력을 발휘했다. 관측보다는 이론을 좋아하고, 한꺼번에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놓고 여러 사람과 공동으로 작업하는 스타일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도 생산성이 높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코스모스> 해설자로 시청자 앞에 선 칼 세이건

- 칼 세이건의 가장 큰 업적은 과학의 대중화라고 하겠다. TV 시리즈 <코스모스>와 여러 권의 과학 교양서, 그리고 대중 강연을 통해 그는 일반 대중이 과학을 친근하게 느끼도록 해 주었다. 나아가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가령 UFO, 심령술, 사이비과학 같은 ‘현대의 미신’을 깨트리기 위해 노력했다. 칼 세이건은 외계 지성체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서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SETI(외계 지성체 탐색) 프로젝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는 에리히 폰 데니켄의 ‘외계인 고대 문명 건설론’이라든지 임마누엘 벨리코프스키의 ‘격변론’을 사이비 과학으로 규정 및 반박.


인기에 연연한 속물인가, 현대의 미신과 싸우는 투사인가?

- 칼 세이건은 아마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을 제외하면 20세기의 그 누구보다 더 유명한 과학자. 특유의 쇼맨십은 그의 명성 구축에 큰 역할을 했다. 워낙 야심이 크고, 과시욕이 있으며, 남들에게 주목 받는 것을 즐긴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칭찬 못지않게 비판도 많았다.

- 세이건의 명성이 커지면서 과학계의 질시 역시 커짐. 칼 세이건의 이런 노력이 많은 일반인을 과학과 친해지도록 만들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정작 그는 천문학계에서는 과학자가 너무 많은 시간을 방송매체에서 보낸다는 것에 불만. 연구활동을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미 국립과학원은 칼 세이건을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걸 끝내 거부했다. 업적으로만 본다면 충분히 회원 자격이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왕성한 대중매체 활동 때문이라는 게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 칼 세이건처럼, 또는 <만들어진 신>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처럼 ‘현대의 미신’과 싸우기에 앞장서는 과학자들은 종종 만사를 ‘과학만능주의’로 재단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세이건이나 도킨스도 마음의 위안 같은 종교의 순기능은 인정한다. 다만 과학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만큼, 종교 역시 스스로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종교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 과학의 영역까지 침범하지는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종교의 신비를 옹호하는 사람을 세이건은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우주라는 또 다른 신비를 제시하고, 그 안에 사는 인간의 왜소함을 보여줌으로써 보다 겸손할 것을 권하는 것뿐이다.


대표적인 저서

- 칼 세이건의 저서로는 <코스모스>(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4)가 단연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에덴의 용>(임지원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6), <혜성>(김혜원 옮김, 해냄, 2003), <잃어버린 조상의 그림자>(김동광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8), <창백한 푸른 점>(현정준 옮김, 사이언스북스, 1996),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상헌 옮김, 김영사, 2001), <에필로그>(김한영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1) 등의 주요 저서가 번역되어 있다. 그의 유일한 소설인 <콘택트>(이상원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1)는 조디 포스터와 매튜 맥커너히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