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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습


# 꽤 괜찮은 역습이었다. 비기기만 해도 되는 경기를 하마터면 크게 질 뻔 했다. 우리 팀이 1-0으로 지고 있는 상황임에도 상대편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25분, 많으면 30분 동안 우리는 1골만 만회하면 된다. 그리고 방금 우리가 보여준 역습은 꽤 괜찮았다. 득점을 하진 못했지만, 우리팀 공격수의 슈팅은 골포스트를 강하게 스쳐 지나갔다. 당황한 상대팀 선수들의 표정을 느낄 수 있었다. '축구는 흐름이다'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역습 이후 우리는 상대편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 이제 후반 40분. 5분, 많으면 8분의 시간이 남았다. 역습 이후 20분간 많은 슈팅을 했음에도 득점을 하진 못했다. 오히려 다시 상대편이 공격을 강화한다. 공격을 진두지휘하는 A가 다시 공을 잡았다. 나는 그를 담당하는 수비형 미드필더다. 그와 다시 거친 몸싸움을 시작한다. 왜소한 체구의 A는 몸싸움에서 밀려서인지, 화려한 기술로 나를 제치려 한다. 나는 이미 그의 몸동작을 파악한 상태다. 그의 오른쪽 발에 걸쳐 있는 공만 쳐내면 된다. 하지만 뇌가 다리에 보낸 신호는 살짝 늦은 것일까. 이미 공을 ‘톡’ 앞으로 쳐내며 달리는 그에게 나는 뒤늦게 다리를 뻗는다. 공과 살짝 거리가 있는 그의 몸만 걸려 넘어진다. ‘아차’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휘-익’ 심판이 휘슬을 분다. 카드를 꺼낸다. 노란색 카드. 하지만 이어 빨간색을 꺼낸다. 나는 전반전에 이미 경고를 받은 상태다. 2장의 노란카드 즉, 퇴장이다. 동료들은 심판에게 달려가 판정이 과한 것이 아니냐는 제스처를 보인다. 당황한 나는 멍하니 경기장에 서있다. 관중들의 야유가 들린다. 벤치에서는 시간이 없으니, 빨리 경기장을 빠져나가라고 손짓 한다. 감독은 답답한 듯 자신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 바로 경기장을 빠져나오는 것이 퇴장의 절차였기 때문에, 경기의 결과는 도무지 알 방법이 없다. 혼자 선수단 버스에 올라탔다. 잠시 하늘을 바라봤을 때 쯤 관중들이 경기장에서 하나둘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경기는 진 것 같다. 버스 근처에는 경찰들이 긴급히 바리케이트를 쳐놓기 시작한다. 분노한 관중들은 버스를 향해 달려온다. 하나 둘 음식물이 날라온다. 그들은 내가 이 버스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하나 둘 동료들이 차에 오르기 시작한다. 모두들 내 어깨를 살짝 치면서 힘내자는 표정을 짓는다. 뒤이어 인터뷰를 마친 감독과 코치가 탑승한다. 버스에 타는 인원이 증가할 때마다 버스에 날아오는 오물도 늘어난다. 심지어 맥주 캔 등 음식물이 아닌 것들도 날라오기 시작한다. 버스 유리창에 이미 많은 기스가 생겨져있다. 그리고 더욱 더 많은 기스가 생겨 날 것이다. 많은 인파 속에 ‘부끄러운 국가대표팀’, ‘본선 진출 실패 대표팀’라는 피켓이 보이기 시작한다. 8회 연속 월드컵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지 못한 죄책감, 특히 내가 퇴장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달라졌을텐데라는 아쉬움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 다음날 스포츠 신문에는 ‘관중의 역습’이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오물로 범벅된 선수단 버스 사진이 실렸다. 관중들은 당분간 국가대표를 응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과 함께, ‘역습’이란 단어로 기사를 마무리 했다. 나와 관련된 기사도 한 켠에 실려 있었다. 마녀사냥은 피하자는 말로 끝맺지만, 결국은 내용은 나의 퇴장이 너무나 아쉬웠다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상대편의 역습도 제대로 막지 못했던 내게, 국민의 역습은 감당하기 너무나 어려운 것들이었다. 1%에 있던 내가, 99%에 합류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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